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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전성기와
「최후의 만찬」이 탄생하는 과정을 그린 매혹적인 이야기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있는 「최후의 만찬」을 직접 관람하는 것은 여느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다. 몇 개월 전에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입장권을 받은 다음, 제한된 인원만 입장하여 단 15분간의 관람만 허용된다. 작품이 최초로 그려진 이래 5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쳐 오면서 「최후의 만찬」은 수차례 비극적인 파괴와 손상을 겪었고, 1977년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되어 1999년 5월에 최종으로 복원을 마무리했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최후의 만찬」은 무려 22년간의 복원 작업을 거친 것으로, 일부 평론가들은 복원 화가들이 80퍼센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20퍼센트 그린 작품 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최후의 만찬」이 지금도 계속 끊이지 않는 방문객을 불러 모으면서 경이로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는 까닭은 무엇일까. 비록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손길이 단 20퍼센트만 남아 있다 하더라도 「최후의 만찬」은 그 자체로 기적의 도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예술사가들은 이 작품을 회화사의 이정표이자 르네상스의 시초로 보며, 예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유럽 예술의 주춧돌’이라고 칭했다.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 전에 있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홍수와 같이 예술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고 평가를 받았다. 강렬한 색채와 미묘한 색조, 폭풍 같은 움직임과 섬세하고 우아한 선, 상징의 아름다움과 생생한 서사, 독특한 인물들의 개성 표현 등 작품의 요소요소가 모두 통념을 뛰어넘는 수준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일생에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의 예술사에서도 「최후의 만찬」의 중요성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보여 준 시대를 앞선 양식과 전무후무한 독창성으로 인해 「최후의 만찬」을 묘사할 때는 ‘기적적’이라는 표현이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작품의 보존에 있어서는 비극적 결함을 갖고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이 작품이 ‘생존’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으로 여겨진다. 수세기에 걸쳐 점점 손상되고 아예 소실되었다가, 500년 뒤에 마침내 일종의 부활을 이룸으로써 가장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책 다 빈치와 최후의 만찬 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게 된 배경에서부터 시작해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전 과정을 다루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던 전성기 시절부터 생애 말년까지, 역사를 바탕으로 한 치밀한 고증과 탄탄한 구성으로 「최후의 만찬」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과 예술가의 삶을 마치 소설처럼 그려 내고 있다. 전작 브루넬레스키의 돔 으로 탁월한 연대기 작가라는 평을 받아 온 로스 킹(Ross King)은 다 빈치와 최후의 만찬 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 예술가의 전성기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들려준다.




1494년의 이탈리아 지도
스포르차와 비스콘티 가문의 가계도
「최후의 만찬」 속 열두 제자

1장 청동 기마상
2장 중년 예술가의 초상
3장 체나콜로, 최후의 만찬
4장 예루살렘에서의 저녁 식사
5장 레오나르도의 작업실
6장 신성 동맹
7장 비밀 해법
8장 여기서도 저기서도 환난뿐이리니
9장 모든 화가는 자신을 그린다
10장 원근법
11장 비례
12장 예수의 애제자
13장 음식과 음료
14장 손의 언어
15장 누구도 공작을 좋아하지 않는다
에필로그?내가 뭔가 이룬 게 있거든 좀 말해 주게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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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한달 뒤에 이탈리아 북부로 여행을 떠날 계획인데, 9월 5일 밀라노에 있는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에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관람할 예정이다.

사실 이번 여행은 여름휴가로 떠나는 가족여행인데, 비행기표를 예매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바로 이 "최후의 만찬"을 관람하기 위한 예약을 먼저 했다.

웹 사이트를 통해 사전 예약을 통해서만 이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는 입장 티켓을 구할 수 있고, 몇 개월 전에 사전 예약 사이트가 오픈 되자마자 전 세계 사람들이 달려들어 금방 마감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가 알고 있는 이 그림에 대한 지식 외에 좀 더 깊이 있는 정보를 얻고 싶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적어도 이 책의 절반 이상은 "최후의 만찬"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보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일생과 밀라노의 지배자 로도비코 가문에 대한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다.

약간 지루한 감도 있었지만 곁다리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어서 괜찮았다.

우선 무어인처럼 피부색이 검었던 로도비코가 밀라노를 통치하기 시작하자 저명한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밀라노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또한 로도비코는 실물보다 큰 청동 기마상을 세워 작고한 부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공적을 기리고 싶었다면서 그 일을 레오나르도가 맡으려 했기에 기마상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레오나르도의 이야기가 이 책 초반부에 서술되어 있다.

전쟁 무기를 만들려고 청동을 몰수해가서 결국 완성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서자로 태어난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 문하에서 미술 공부를 했는데, 베로키오가 1460년대 중후반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과 일하면서 성공 가도를 달릴 때 레오나르도가 그의 작업실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음악과 시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의 정신적 스승이 되었으며, 레오나르도 자신도 한 때 로렌초 데 메디치 밑에서 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을 미루기만 하고 계약을 불이행하는 레오나르도의 주의 산만과 실험 정신, 완벽주의, 전반적인 지적 변덕 같은 태도는 화가로서 초기단계였던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최후의 만찬"이 그려지게 될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은 스포르차 가문 묘지로 꾸며졌으며,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이었다고 한다.

"최후의 만찬"은 길이 35.

5미터, 너비 8.

8미터의 내부에 가장자리를 빙 둘러 식탁들이 놓여 있는 식당 벽에 그려지도록 계획되었는데, 수사와 수녀들이 침묵 속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묵상을 고무시켜줄 볼거리를 제공해주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보통 이런 식당 벽에는 천사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아브라함, 오병이어, 최후의 만찬 같은 테마가 그려졌으며, "최후의 만찬" 그림 자체를 그 그림이 그려져 있는 장소와 연관시켜 식당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복수형 체나콜리(cenacoli)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배당이나 식당 벽에 그리는 그림은 제단화와 초상화와 달리 템페라화가 아니라 프레스코화로 그려지는데, 레오나르도의 스승이었던 베로키오는 프레스코화를 한번도 그려 본적이 없고 레오나르도에게 전수해줄 수 없었을 것이라 한다.

레오나르도 역시 프레스코화는 한번도 그려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프레스코(fresco)는 신선하다는 뜻인데, 안료를 물에 갈아서 그것을 축축한 회반죽 위에 칠하게 되고, 그러면 회반죽이 마르면서 안료가 스며들고 안료와 회반죽이 화학적으로 융합되면서 벽 표현에 유리 같은 층이 생겨 그 안에 안료가 담기게 되는 방식의 그림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회반죽이 아직 마르지 않았을 때 그려야 하기 때문에 신선하다는 뜻이 담긴 프레스코화라고 불리며, 갓 바른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 했으므로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서 재빨리 그려야만 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벽면에 하루에 그릴 수 있는 양 이상으로 회반죽을 칠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된다는 것이다.

또한 회반죽의 알칼리성을 이겨 낼 수 있는 안료만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색깔 선택에서도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광물질에서 추출한 울트라마린, 남청색, 말라카이트 녹색 등 가장 선명한 파랑과 녹색 계열 대부분은 안료를 접착액에 섞은 다음 회반죽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칠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한 가지 비법은 카툰(두꺼운 종이)이라는 밑그림을 벽에 옮겨 그리는 것이라 하는데, 프레스코화 실물 크기의 본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작은 밑그림들을 격자를 써서 확대한 다음 두 세 장에서 십여 장에 이르는 종이들을 붙여 만든 최종 밑그림에 전사하여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프레스코화는 화가의 첫 붓질이 시작되기까지 엄청나게 긴 준비가 필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는데, 비계를 고안해서 세워야 하고, 회반죽을 개어서 발라야 했으며, 밑그림의 도안을 벽에 전사해야 하는데, 밑그림 자체도 몇 백장의 종이를 소모하는 무수한 예비 드로잉을 거쳐서 탄생하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프레스코화의 특징은 색깔 조절이나 빛과 그림자의 변화 등 미묘한 효과에 관심이 많았던 레오나르도에게는 맞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유화적인 기법에다 안료를 기름뿐 아니라 달걀 노른자와도 섞어서 오일 템페라화를 창조할 생각을 했고, 이 과정은 선례가 전혀 없어서 미리 실험해보았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 기법은 물감이 다 마른 뒤에 다시 몇 겹씩 덧바르는 식으로 색을 칠할 수 있으며, 레오나르도는 각기 다른 색깔을 너덧 층까지 쌓아 올리며 형태를 잡고 색조를 만들어내었다고 설명한다.

색깔은 프레스코화에는 쓸 수 없는 안료들, 특히 울트라마린이나 남청색 같은 푸른색과 버밀리온 같은 붉은색 계열을 많이 썼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광물이 섞인 안료는 석회의 영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프레스코 화가들은 팔레트에서 쓸 수 있는 색깔에 제한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안료들은 달걀 흰자 같은 접착제와 섞으면 벽에 칠할 수 있었지만 접착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색되었고, 따라서 프레스코 화가들은 회반죽과 공존할 수 있으며 물 이외에 다른 접착제와 섞지 않아도 되는 안료들만 쓰라는 조언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전에 그려졌던 대다수의 "최후의 만찬"을 테마로 한 그림은 요한 복음서를 따랐지만 상당 부분 예술적인 변주를 했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도 역시 요한 복음서의 내용을 기준으로 삼았지만 자기만의 독특한 구성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물론 초기 스케치에서는 유다만 혼자 식탁 맞은편에 앉히고 요한을 예수의 품 안에 잠들어 있는 것으로 그리는 등 관습적으로 그렸지만, 이내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 식당 반대편 벽에는 프레스코화 경험이 많은 조반니 도나토 다 몬토르파노라는 밀라노 출신 화가가 예수의 십자가 수난 장면을 그렸다고 한다.

이렇게 "최후의 만찬" 그림은 특별히 십자가 수난 장면과 짝을 이루어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언급한다.

현재까지 "최후의 만찬" 그림 위쪽에 남아 있는 스포르차 가문의 문장들에 대해서도 설명이 이어진다.

 몸을 지그재그로 꼬고 사람을 잡아먹고 있는 뱀은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인데, 스포르차 가문의 프란체스코가 비스콘티 가문과 결혼하면서 스포르차 가문에 영입된 역사를 형상화하는 문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로도비코 자신은 뽕나무나 무어인을 형상화하여 상징으로 삼았고, 무치오 아텐돌로가 잠깐 동안 나무꾼으로 일했던 시절을 가리키는 도끼를 휘둘러 통나무를 토막 내는 두 손도 가문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식당 북쪽 벽 둥근 아치형 천장 바로 밑에 반달 모양 세 개의 공간에 스포르차 왕가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세 개의 문장 방패를 그리라는 명에 따라 좌측 상단에 로도비코의 장남 마시밀리아노의 문장, 우측 상단에 마시밀리아노 동생 프란체스코의 문장, 중앙에는 로도비코와 그의 아내 베아트리체의 문장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현재 부분적으로 소실되었지만 황제의 독수리와 비스콘티 가문의 독사가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베아트리체는 흰 색 독수리와 에스테 가문의 문장을 장식하는 백합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그림 중심에 있는 예수의 얼굴은 세속적인 추기경으로 악명이 높았던 아스카니오 스포르차의 부관이었던 조반니 콘테였을거라 추정하고 있다.

그는 나중에 이탈리아에서 가장 잔악한 군 지도자가 되는 체사레 보르자를 받드는 군인이었다는 점도 지적한다.

어쨌든 그의 얼굴에 수염을 추가해 예수의 얼굴을 묘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레오나르도가 만일 자신과 친했던 브라만테를 제자들 중 한 명으로 그렸다면 제자 바르톨로메오가 확실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르톨로메오 앞에 있는 포도주 잔이 거의 비어 있는 이유가 사치스러운 생활로 유명하던 브라만테를 모델로 그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레오나르도가 "최후의 만찬" 그림 작업을 할 때 연백 밑칠을 마친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회반죽에 못을 박는 일이었다고 한다.

벽화의 정중앙 예수의 얼굴이 그려질 자리에다 모든 선들과 시선이 수렴되는 소실점을 표시하고자 작은 구멍을 내었다고 하는데, 현재도 예수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못 구멍이 남아있다고 한다.

직선 원근법의 대가였던 레오나르도는 화면에 직각이 되는 선들은 소실점으로 수렴되게 하고, 수평이 되는 선들은 일정한 간격에 따라 점차 화면 후방으로 사라지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이 그림은 수학적이고 음악적 비율에 따라 공간을 잘 계산했다고 하는데, 등차수열 형식이라 한다.

식당 벽의 전체 너비를 12개 칸으로 나눈다고 한다면 화면 위쪽 정간이 있는 천장은 6칸으로 1:2의 비율이며, 그림에서 후방 벽의 너비는 4칸이고, 창문은 3칸이기에 전체적으로 12:6:4:3이라는 비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비슷한 비율이 그림 속 벽에 걸린 융단의 간격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융단들은 너비가 일정하지 않으며 방 뒤쪽으로 갈수록 1:1/2:1/3:1/4의 비율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레오나르도는 신학적 중요성이 큰 인물인 예수를 제자들보다 월등히 크게 그린 위계적 원근법도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예수를 열린 창문 맞은 편에 둠으로써 더 강조했는데, 예수의 얼굴과 머릿결, 붉은색 옷의 따뜻한 색조가 앞으로 튀어나와 보이고, 풍경의 차가운 푸른 색조는 안으로 들어가 보이도록 빛에 의한 처리를 잘 활용했다고 한다.

예수의 왼쪽 어깨를 덮고 있는 푸른색 망토에 사용된 안료는 가장 밝고 가장 비싼 안료인 울트라마린이라 한다.

모든 "최후의 만찬" 그림들은 대다수 구레나룻이 난 중장년의 제자들 속에서 요한을 약간 여성적인 느낌이 나는 청년으로 그렸다고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최후의 만찬" 속 요한의 모습을 보고 여자인 마리아 막달레나로 규정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데, 이것은 믿을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

그 당시 레오나르도는 다른 그림에서도 성별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표현을 아꼈으며, 후기작인 "세례자 요한"에서도 요한을 여성스러운 얼굴로 표현했고, 그 당시 양성구유는 완벽한 인간을 상징하며 부정적인 뜻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최후의 만찬" 속에 표현된 식탁과 식탁보, 접시, 컵 등은 그 당시 수도원에서 쓰던 것을 그대로 옮겨 그렸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특히 대 야고보 앞에 놓여 있는 물이 담긴 유리병은 표면에 비친 빛까지 표현하고 있어 세밀하게 묘사되었다고 한다.

한편 예수와 제자들이 식사하고 있는 공간에는 한 쪽에 네 개씩, 총 8개의 융단이 걸려있는데, 이것은 당대의 궁전 분위기를 보여주고자 한 장치였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성경 속에는 이 만찬에 올라간 음식과 음료에 대해 많은 설명이 없기에 이 부분은 화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채워 넣어야 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최후의 만찬"을 소박하고 검소한 식사 장면으로 그렸지만 레오나르도는 음식이 넉넉히 담겨 있는 확연히 다른 식사 장면을 연출했다고 한다.

특히 마태오 앞에 놓인 접시에는 저민 오렌지 조각을 곁들인 장어가 놓여있다고 한다.

이 음식은 성당 식당의 저녁 식탁보다는 궁정의 연회에 더 잘 어울리는 고급 음식인데, 이런 음식이 그려진 것은 이 그림 자체가 로도비코 정권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저 단순히 공작의 식탁에서 먹었던 별미를 그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언급하고 있다.

요한복음서에는 성찬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식사 장면에 성배가 빠져있고, 예수의 살과 피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빵과 포도주를 강조했다는 점도 언급한다.

그래도 저자는 이 "최후의 만찬" 그림을 유다의 배신에 대한 선포와 성찬례 제정을 같이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는 유다와 같은 접시로 뭔가를 집으려고 손을 뻗고, 그와 동시에 그 앞에 있는 포도주 잔에도 손을 뻗고 있다고 말한다.

예수의 왼손도 손이 닿는 거리에 있는 빵을 가리키며, 시선은 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관람객의 시선이 구도의 중심에 있는 예수의 얼굴에 집중되고, 예수의 얼굴은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통해 다시 관람객의 시선이 사선으로 그의 왼쪽 팔을 따라 손으로, 마지막으로는 빵으로 이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의 칼 끝은 식탁 맨 왼쪽에 서 있는 바르톨로메오에게 겨누어져 있는데, 산채로 가죽이 벗겨져 순교한 바르톨로메오의 섬뜩한 죽음과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던 고통과 시련을 예고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고 대 야고보 뒤에서 오른쪽 검지로 위를 가리키고 있는 토마스의 손동작과 관련하여 토마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실질적인 증거를 요구하여 옆구리에 손가락을 직접 넣어본 일화를 상징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 밖에도 예수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은 그 쪽이 구원과 영원의 방향이며, 이와 반대로 왼쪽은 불길하다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유다는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을 뻗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한편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비스듬하게 틀면서 소금 통을 쳐서 소금을 엎지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원래는 잔을 쳐서 엎어뜨리는 스케치였고, 소금 통은 지금 벽화가 훼손되어 안 보인다고 한다.

소금은 인간 생명에 필수적인 물질이자 끝없는 재생의 이미지이며, 사도들과 평범한 사람들이 하느님과 맺는 약속의 징표인데다가 좋은 건강과 행운의 상징이기 때문에, 소금 통을 엎는 것은 불길한 징조를 암시하는 것이라 한다.

또한 레오나르도가 그린 유다는 어떤 식으로도 유대인의 캐리커처는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추정하는 유다의 악한 얼굴은 부분적으로 그의 이목구비를 다시 손본 과거 복원 화가들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또 일부분은 모사를 하면서 배신자를 응당 악하게 그린 모사화가들의 탓이라 한다.

둘의 코와 입은 거의 똑같기에 시몬은 사실 유다와 같은 모델로 그려졌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한편 레오나르도는 창문으로 후광이 드리워진 예수의 빛나는 얼굴과, 그늘이 져 어둡고 보는 이에게는 얼굴을 일부분 돌리고 있는 유다의 얼굴을 대비시켰다고 한다.

유다에게 보라색 옷을 입히고 겉에 걸친 옷은 파란색 옷을 입혔으며, 소매는 빛이 들어서 초록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예수의 푸른 망토의 물감은 울트라마린이라고 앞서 설명했는데, 이 비싼 재료는 바르톨로메오와 베드로, 마태오, 필립보의 옷에도 썼지만 유다의 파란색은 울트라마린이 아니라 값싼 남청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보색대비가 뚜렷한데, 바르톨로메오가 걸친 겉옷의 초록색은 소 야고보의 짙은 붉은 색깔과 대비되고, 마태오의 파란색 겉옷은 다대오의 번쩍이는 노란색과 대조되며, 필립보의 오렌지색 겉옷은 그의 파란색 소매와 대조되고, 나아가 인물들이 걸친 겉옷의 색깔은 식탁의 선을 따라 세심하게 배열되어 있어서 색들이 번갈아 가며 패턴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빛 때문에 원래 색이 바뀌도록 미묘하게 채색되었던 부분은 벽화가 손상되어 이제 볼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 벽화가 식당 벽 위쪽에 그려졌기에, 이상적인 관람지점은 그림이 그려진 벽에서 9미터, 허공으로 4.

5미터 올라간 지점이라 한다.

이 그림의 원근법은 바닥의 어느 지점에서 보아도 완벽해 보이지 않지만, 또한 시각적 속임수 때문에 바닥의 다른 어느 지점에서 보더라도 특별히 더 왜곡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언급하고 있다.

이를테면 벽에 걸린 융단은 방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더 가깝게 붙어 있으면서도 너비는 더 넓어지며, 융단의 꽃무늬는 사선을 따라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벽면에 평면적으로 그려져 있고, 천장의 격자는 90도로 되어 있는 천장 돌림띠의 수평에 맞지 않으며, 식탁은 방에 비해 너무 길고, 식탁에 모인 인물들의 수에 비해서는 너무 작다고 한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이 벽화가 수많은 복원과 덧칠 과정을 거쳐 극적으로 파괴되어 현세적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통렬한 상징으로 거듭난 사연을 이야기한다.

이 "최후의 만찬"은 결국 전에는 예술적 영광으로 유명했다면, 이제는 그 심각한 손상과 위험에 빠진 생존 여부로 유명해졌다는 말이다.

마지막 복원의 노력은 1977년부터 22년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먼지 흡수 발판을 거쳐 오염물질 여과 장치를 통과해 들어가서 15분간 보는 그 유명한 작품은 솔직히 인정하건대 레오나르도가 애초에 공개했던 그림과는 한참 다르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최대한 가능한 부분까지 그림을 안정시키고 원래 상태로 되돌리려는 복원가들의 노력은 존경스럽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복음서의 일화만이 아니라 이 그림 자체가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면서 마무리한다.

그 밖에 이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육십대나 칠십대의 노인으로 묘사된 레오나르도 드로잉은 자화상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었다.